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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공동체의 변화: 가정에서 글로벌까지

# **4장. 공동체의 변화** {#4장.-공동체의-변화}

4장. 공동체의 변화 {#4장.-공동체의-변화}

공동체산업시대디지털시대
가정핵가족 중심 자녀 통제정서적 지원과 협력적 창작 단위
이웃산업화로 유대 소멸취향·생활방식 기반 선택적 네트워크 공동체
마을대도시화로 마을 붕괴생활 자원·정보의 효율적 공유체
도시산업화 중심 개인 삶 지배개인 자유·역량 실현 지원 허브
국가법·제도·권력 독점 체제외교·국방 등 최소 기능 수행
글로벌강대국 주도 국제기구탈 국가적 AI 에이전트의 네트워크

디지털 전환은 공동체의 구조를 물리적 공간 기반에서 데이터 네트워크 중심의 논리로 전환시키고 있다. 미디어가 인간의 지각과 사회 조직에 구조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 McLuhan(1964)의 통찰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 공동체의 재편 과정을 이해하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Castells(2000)의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 개념과 함께, 이러한 전환은 사회를 AI 엘리트 계층(5%), AI 강화 계층(25%), AI 대체 계층(65%), AI 소외 계층(5%)라는 4개 계층으로 분화시키면서 각 공동체 단위에 차별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계층 분화는 경제적 지위와 기술 접근성의 차이를 기반으로 하되, 각 집단이 서로 다른 미디어를 소비하면서 상이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상상하고 경험하게 됨으로써 더욱 공고화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Anderson(1983)의 '상상의 공동체' 개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Anderson의 분석에 따르면, 인쇄자본주의는 신문과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수백만 명이 동시에 같은 내용을 읽으며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상상된 동질감을 만들어냈다. 아침에 신문을 읽는 시민들은 서로 만난 적 없지만, 같은 언어로 같은 뉴스를 소비하면서 하나의 민족공동체에 속한다고 상상했다. 이러한 상상은 명확한 영토적 경계와 표준화된 국가 언어, 그리고 일방향적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동질적 경험에 기반했다.

그러나 디지털 자본주의는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개인화된 콘텐츠 피드를 제공하면서, 각 계층이 전혀 다른 방식의 상상된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유튜브 구독자들은 '우리는 이 크리에이터를 사랑하는 공동체'라고 느끼고, 트위터 해시태그를 통해 '우리는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상상한다. 게임 길드원들은 물리적으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우리는 함께 싸우는 동료'라는 강렬한 소속감을 공유한다. 중요한 것은 각 계층이 자신의 경제적 위치와 기술 역량에 맞는 플랫폼과 콘텐츠를 선택하면서, 서로 다른 '우리'를 상상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디지털 자본주의는 개인이 동시에 여러 상상의 공동체에 소속되는 '다중 정체성'을 가능하게 한다. 한 사람이 K-pop 팬덤, 암호화폐 투자자 커뮤니티, 육아맘 네트워크에 동시에 참여하면서, 각각의 맥락에서 서로 다른 '우리'를 상상한다. 이는 Anderson이 분석한 단일하고 배타적인 민족 정체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으로, 4개 계층 각각이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AI 엘리트 계층(5%)는 플랫폼을 소유하고, AI 기술을 개발하며, 디지털 자산의 조각 소유를 통해 마이크로 자본가가 아닌 메가 자본가로 부상한다. 이들의 가정은 혁신 생태계의 허브가 되고, 이들이 형성하는 이웃은 글로벌 테크 엘리트 계층 네트워크가 되며, 이들이 선택하는 도시는 세계적인 혁신 클러스터로 발전한다.

AI 강화 계층(25%)은 AI Agent 경제와 개인 기업화의 주요 수혜자가 된다. 이들의 가정은 협력적 창작 단위로 전환되고, 관심사 기반의 전문가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이웃 관계를 형성하며, 특화된 마을과 도시에서 집적 효과를 누린다. 구독 경제와 조각 소유를 통해 기존보다 훨씬 다양한 자산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중산층의 자산 포트폴리오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AI 대체 계층(65%)는 가장 복합적인 영향을 받는다. AI 노동 대체와 정규 직업 노동 감소로 인해 경제적 불안정성에 노출되지만, 동시에 구독 경제를 통한 저비용 접근과 조각 소유를 통한 미시 투자 기회를 얻는다. 이들의 가정은 다중 수입원을 추구하는 경제 단위가 되고, 플랫폼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이웃 관계를 형성하며,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마을 단위 협력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플랫폼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알고리즘 변화에 취약한 구조적 한계를 갖는다.

AI 소외 계층(5%)는 3대 경제 동력의 혜택에서 배제되면서 빈부 격차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이들의 가정은 전통적 경제 관계에 의존하게 되고, 물리적 근접성 기반의 이웃 관계를 유지하려 하며, 디지털 전환에서 소외되는 마을과 도시에 집중된다. 탈국가 경제의 확산은 이들이 의존하던 전통적 사회보장 체계를 약화시키면서,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킨다.

1. 가정: 협력적 창작 단위로의 전환 {#1.-가정:-협력적-창작-단위로의-전환}

디지털 전환은 가정을 전통적인 재생산과 소비의 공간에서 정서적 지원과 협력적 창작이 융합된 복합적 생산 단위로 재구성하고 있다. Giddens(1992)의 '친밀성의 변형(transformation of intimacy)' 개념이 제시한 현대적 친밀성의 재구조화는, Castells(2000)의 '네트워크 사회' 이론과 교차하면서 가정을 정서적 유대 기반의 창조적 협업 플랫폼으로 진화시킨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65%를 차지하게 될 AI 대체 계층의 확대가 있으며, 이는 가정의 경제적 기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개인의 기업화와 AI Agent 경제의 확산으로 가정 구성원 각각이 독립적인 경제 주체가 되면서, 산업사회를 지탱해온 '가장 중심의 소득 구조'가 해체되고 소득 원천의 다원화와 경제적 의사결정의 분산화가 진행된다. 이는 단순한 경제구조의 변화를 넘어, Hochschild(1983)가 제시한 감정노동의 개념이 가정 내부로 확장되면서 가족 구성원 간 상호 정서적 코칭과 디지털 번아웃 관리가 일상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AI 엘리트 계층 가정은 "전략적 친밀성(strategic intimacy)"을 구축하여 정서적 지원이 곧 비즈니스 네트워킹의 토대가 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가족 구성원 각각이 고도의 디지털 역량을 보유하여 테크 스타트업, AI 개발, 블록체인 프로젝트 등에서 협력적 창업을 주도하는데, 이는 단순한 가족 기업을 넘어선 혁신 생태계의 미니어처다. 이들은 가족 네트워크를 통해 벤처캐피털 연결, 기술 자문,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동시에 추진하며, 가정 자체가 혁신 생태계의 핵심 노드로 기능한다. Wellman(2001)의 네트워크 개인주의 이론은 가족이 각 구성원의 광범위한 외부 네트워크 안에서 가장 밀도 높게 연결된 클러스터로 기능한다고 설명하는데, AI 엘리트 계층 가정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Florida(2002)의 창조계급 이론에서 제시한 3T(Technology, Talent, Tolerance)가 가정 내부에서 먼저 실현되며, 아침 식탁에서의 대화가 곧 전략 회의가 되고, 주말 가족 모임이 해커톤으로 변모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5%에 불과한 이들의 존재는 플랫폼 독점과 승자독식 구조를 통해 극단적 부의 집중을 만들어내는데, 이들 소수 가정의 경제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는 동안 나머지 계층은 플랫폼 수수료와 알고리즘 변화에 취약한 불안정한 경제 구조에 종속된다.

AI 강화 계층 가정은 "협상된 친밀성(negotiated intimacy)"을 통해 각자의 전문성을 인정하면서도 가족적 유대를 유지하는 섬세한 균형을 추구한다. 이들 가정에서는 부모의 전문 분야(디자인, 마케팅, 금융 등)와 자녀의 디지털 네이티브 감각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컨설팅 회사,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온라인 교육 플랫폼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한다. Benkler(2006)의 '동료 생산(peer production)' 모델이 가족 단위에 적용되면서, 전통적인 위계질서 대신 수평적 협력 구조가 형성된다. Jenkins(2006)가 제시한 참여문화는 세대 간 지식 전수의 방향을 역전시켜, 자녀가 부모에게 디지털 리터러시를 가르치고 부모가 자녀에게 산업 도메인 지식을 전수하는 양방향 학습이 일상화된다. 디지털 환경에서 신뢰와 역할 분담이라는 가족의 내재적 특성을 '사회적 자본'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이들은, 유튜브 가족 채널을 통해 일상을 콘텐츠화하고, 가족 단위 온라인 쇼핑몰로 부업을 창출하며, 부모-자녀 공동 창업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혁신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상은 북미의 실리콘밸리, 유럽의 스타트업 허브, 아시아의 디지털 도시를 막론하고 확산되고 있으며, Putnam(2000)이 구분한 결속형 자본(bonding capital)과 연결형 자본(bridging capital)이 가정 내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새로운 사회적 자본의 형태를 보여준다.

AI 대체 계층에 속하는 대다수 가정들은 "생존적 연대(survival solidarity)"를 형성하여 경제적 불안정성에 대한 정서적 완충 장치로서 가족이 기능한다. 전통적 고용 관계의 붕괴에 직면한 이들은 가족 단위의 다중 수입원 전략을 필연적으로 채택하게 되는데, 부모는 우버나 배달의민족 같은 플랫폼 노동에 참여하여 시간당 임금을 벌고, 자녀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한 콘텐츠 제작으로 조회수 기반 수익을 창출하며, 조부모는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나 쿠팡 파트너스를 통해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식으로 가족 전체가 디지털 경제의 톱니바퀴가 된다. 전통적으로 가정이 담당했던 소비와 재생산의 사적 기능은 이제 공적 영역과 뒤섞이면서, 에어비앤비를 통한 주거공간의 상품화, 유튜브를 통한 일상의 콘텐츠화, 인스타그램을 통한 가족 행사의 브랜드화 등으로 생산과 경제활동의 거점으로 완전히 전환된다. Standing(2011)이 분석한 프레카리아트의 불안정성은 가족 단위의 정서적 지원망으로 부분적으로 완화되지만, 조각 소유와 구독 경제의 확산으로 부동산이나 자동차 같은 대형 자산의 공동 소유가 사라지고 각 구성원이 디지털 토큰, NFT, 구독 서비스, 플랫폼 지분 등을 개별적으로 소유하게 되면서 가정의 경제적 결속력은 약화된다. 역설적으로 경제적 자율성은 강화되지만 집단적 안정성은 훼손되는 이중적 상황에서, Turkle(2011)이 경고한 '함께 있기만 한 고독(alone together)'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 친밀성 구축의 노력이 절실해진다.

AI 소외 계층 가정에서는 "단절된 친밀성(disconnected intimacy)"이 구조화되면서 디지털 격차가 곧 정서적 격차로, 나아가 존재론적 격차로 전환되는 비극적 상황이 전개된다. 부모 세대가 디지털 기술을 거부하거나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녀들은 온라인 교육, 틱톡, 로블록스 같은 메타버스 플랫폼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에 몰입하게 되면서,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듯한 가족 내 소통과 가치관의 근본적 단절이 발생한다. Bauman(2003)의 '액체 근대성(liquid modernity)' 개념이 예견한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관계가 가족이라는 가장 견고해야 할 울타리 내부까지 침투하여, 세대 간 문화적 재생산의 고리가 끊어지고 정체성 전수의 메커니즘이 작동을 멈춘다. Beck과 Beck-Gernsheim(2002)이 제시한 '개인화된 사회'의 가장 어두운 측면이 이들 가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개인화는 선택이 아닌 강요가 되고, 1인 가구의 증가와 함께 개별 가정이 독립적인 경제 단위로 기능해야 하는 압력은 이미 취약한 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이중, 삼중의 부담을 안긴다. 디지털 전환이 약속한 연결과 소통의 확대는 이들에게는 소외와 단절의 심화로 귀결되며, 가정이라는 안전망마저 해체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하층 계급으로 고착화될 위험에 직면한다.

2. 이웃: 취향·생활방식 기반 선택적 네트워크 기반 공동체 {#2.-이웃:-취향·생활방식-기반-선택적-네트워크-기반-공동체}

디지털 전환은 이웃의 개념을 물리적 근접성에서 네트워크 기반 관심사 공동체로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해체되었던 이웃 관계가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취향과 생활방식을 중심으로 재구성되면서, Granovetter(1973)가 제시한 '약한 연결의 힘(strength of weak ties)'이 경제적 가치 창출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사회적 연결망의 확장을 넘어, 플랫폼 독점이 이웃 관계에서 경제적 기회의 분배를 알고리즘이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전통적 이웃 관계의 호혜성 원칙을 알고리즘 기반 효율성 원칙으로 대체한다. 25%의 AI 강화 계층과 65%의 AI 대체 계층이 동일한 플랫폼에서 경쟁하지만, 알고리즘의 차별적 노출로 인해 경제적 성과에 극명한 차이가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계급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AI 엘리트 계층은 "플랫폼 주권(platform sovereignty)"을 행사하며 디지털 이웃 관계의 규칙을 설계하고 통제한다. 이들은 자체 플랫폼을 개발하거나 기존 플랫폼의 핵심 파트너로 활동하면서 플랫폼 경제의 룰 메이커 역할을 수행하는데, Patreon에서 월 수십만 달러의 후원을 받거나 Substack에서 유료 구독자 수만 명을 확보하는 등 창작자 경제의 최상위층을 형성한다. Srnicek(2016)의 '플랫폼 자본주의' 분석이 정확히 포착한 바와 같이, 이들에게 플랫폼은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립적 매개체가 아니라 경제 활동 전반의 구조를 형성하는 권력 장치다. 이들은 알고리즘 설계, 수익 분배 구조, 커뮤니티 가이드라인 설정을 통해 수백만 명의 디지털 이웃들의 경제적 운명을 좌우한다. Zuboff(2019)가 '감시 자본주의'에서 경고한 행동 잉여의 추출과 예측 시장의 창출이 바로 이들의 손에서 이루어지며, 디지털 이웃 관계는 데이터 추출과 가치 창출의 원천이 된다.

AI 강화 계층은 "전문성 기반 네트워킹(expertise-based networking)"을 통해 글로벌 규모의 이웃 관계를 형성한다. Skillshare에서 온라인 강의를 통해 연간 10만 달러 이상의 안정적 수익을 올리거나, Medium의 파트너 프로그램을 통해 전문성 기반 콘텐츠로 부가 수입을 창출하는 이들은 지리적 제약을 넘어선 지식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이다. 2024년 기준 Etsy는 활성 구매자 9,550만 명, 활성 판매자 813만 명을 보유하며 연간 매출 28억 달러를 기록했고, Patreon은 20만 명 이상의 창작자가 총 35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800만 명의 활성 후원자를 보유하는 거대한 디지털 이웃 생태계를 형성했다. 이들 전문직은 기존 전문성을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확장하며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개인 브랜드를 구축하는데, Boyd(2014)가 분석한 '네트워크화된 공중(networked publics)' 개념이 현실화되면서 이웃은 더 이상 물리적 공간이 아닌 관심사와 전문성의 교집합으로 정의된다.

AI 대체 계층은 "알고리즘 종속적 연대(algorithm-dependent solidarity)"를 형성하며 창작자 경제의 다수를 구성하지만 수익 분배에서는 롱테일의 하위에 위치한다. Skillshare의 1,300만 명 등록 사용자와 50만 명 유료 구독자 중 상위 1%가 전체 수익의 50% 이상을 독점하는 구조에서, 이들 대다수는 플랫폼 수수료, 광고 수익 변동, 알고리즘 변화 등 통제 불가능한 외부 요인에 의해 소득이 좌우되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다. Van Dijck(2013)의 '연결의 문화(The Culture of Connectivity)' 분석이 지적한 바와 같이, 플랫폼은 개인 간의 연결뿐 아니라 공동체 규범과 행동 양식 자체를 재정의하는데, AI 대체 계층은 이 과정에서 수동적 참여자로 남는다. AI 노동 대체의 확산은 이웃 단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만들어내는데, 한 사람의 AI 활용 역량 향상이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기회를 감소시키는 제로섬 경쟁 구조가 형성되면서 전통적 이웃의 협력적 경제 관계가 경쟁적 관계로 전환된다. 이들에게 창작 활동은 전통적 고용의 대안이자 자아실현의 수단이지만, Anderson(2012)의 '롱테일' 이론이 약속한 민주적 기회는 실제로는 극소수에게만 실현되는 신기루에 가깝다.

AI 소외 계층은 "디지털 고립(digital isolation)" 상태에서 플랫폼 기반 창작자 경제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디지털 도구 사용의 어려움, 온라인 마케팅 역량 부족, 플랫폼 정책의 복잡성 등으로 인해 이들은 창작자 경제의 혜택을 누리기 어려우며, 전통적으로 아마추어나 취미 영역으로 여겨졌던 활동들이 전문적인 경제 활동으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된다. Bourdieu(1986)의 문화자본 이론이 예측한 바와 같이, 디지털 리터러시의 부재는 곧 경제적·사회적 자본의 박탈로 이어진다. 지리적 근접성보다 관심사와 가치관의 일치가 새로운 사회적 유대의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디지털 접근성의 부족은 사회적 고립으로 직결된다. 이들에게 이웃은 여전히 물리적 공간에 묶여 있지만, 그 물리적 이웃마저도 디지털 플랫폼(당근마켓, 네이버 카페 등)으로 이주하면서 이중의 소외를 경험한다.

구독 경제와 조각 소유의 확산은 이웃 간 자산 공유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재구성한다. 전통적인 물리적 근접성 기반의 자산 공유(공구 대여, 육아 협력, 김장 나눔 등)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서비스 접근권 공유로 대체되면서, Benkler(2004)가 제시한 '공유 경제(sharing economy)'의 이상과는 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Spotify의 패밀리 플랜, Netflix의 계정 공유, Adobe Creative Cloud의 팀 라이선스 등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이웃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는 물리적 이웃이 아닌 관심사 기반 네트워크 내에서 이루어진다. Rifkin(2000)이 『소유의 종말』에서 예견한 접근권 사회가 현실화되면서, 이웃 관계는 소유물의 공유에서 접근권의 공유로, 물질적 교환에서 디지털 구독의 분담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변화는 Putnam(2000)이 『나 홀로 볼링』에서 우려한 사회적 자본의 쇠퇴를 디지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시도이지만, 계층별로 상이한 접근성과 활용 능력의 격차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도 작동하고 있다.

3. 마을: 물리적 인접성 기반 생활·자원 정보의 효율적 공유체 {#3.-마을:-물리적-인접성-기반-생활·자원-정보의-효율적-공유체}

디지털 전환 시대에도 마을은 여전히 물리적 인접성을 기반으로 한 협력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그 기능과 역할은 생활 자원과 정보의 효율적 공유 공동체로 진화하고 있다. 이웃이 관심사와 취향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기반 공동체라면, 마을은 여전히 지리적 경계 내에서 일상생활의 필수 자원과 서비스를 공유하는 물리적 공간 단위로 기능한다. Oldenburg(1989)가 제시한 '제3의 장소(third place)' 개념이 디지털 시대에 재해석되면서, 마을은 집(제1의 장소)과 직장(제2의 장소)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하이브리드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는 25%의 AI 강화 계층 집중이 특정 마을의 공간 가치를 디지털 브랜드화시키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는데, 이들의 집적은 집적경제(agglomeration economy) 효과를 통해 마을 전체의 경제적 가치를 상승시키지만, 동시에 탈국가 경제의 성격을 띠면서 지역세나 지역 공헌과는 분리된 경제 활동을 전개하는 이중적 특성을 보인다.

AI 엘리트 계층과 AI 강화 계층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서 형성되는 창조산업 클러스터는 마을의 물리적 공간을 글로벌 네트워크의 노드로 전환시킨다. 실리콘밸리의 팰로알토(Palo Alto)는 이러한 변화의 원형을 보여준다. 스탠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 클러스터와 샌드힐 로드(Sand Hill Road)의 벤처캐피털 집적지가 결합되어, 2024년 기준 중간 주택 가격이 350만 달러를 넘어서는 극단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을 경험했다. Saxenian(1994)의 『지역 우위(Regional Advantage)』가 분석한 실리콘밸리의 네트워크 기반 산업 생태계가 바로 이러한 마을 단위에서 시작되었다. 마운틴뷰(Mountain View)는 구글플렉스를 중심으로 AI 강화 계층이 밀집한 마을로, 2010년대 초 연간 3만 달러였던 임대료가 2024년 현재 7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교사, 소방관 같은 필수 서비스 인력조차 거주할 수 없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나타난다. 성수동의 경우 5년간 84%의 부동산 가격 상승을 기록하며 낡은 공장과 창고가 트렌디한 카페, 디자인 스튜디오, 패션 브랜드로 변모했다. Castells(2000)의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 개념이 정확히 포착한 바와 같이, 이들 지역의 가치는 지리적 위치보다는 글로벌 네트워크에서의 기능적 역할과 전문성에 의해 결정된다. 경리단길 역시 이태원 인근의 작은 골목에서 독립 문화와 개성 있는 소상공인들이 모여드는 문화적 클러스터로 진화했으며, 이는 Jacobs(1961)가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강조한 도시 다양성과 자생적 활력이 디지털 시대에 재현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은 Zukin(1995)이 경고한 '진정성의 상품화(commercialization of authenticity)'라는 역설을 내포하며, 원주민과 신규 유입자 간의 갈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AI 대체 계층은 마을 단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로컬 비즈니스를 창출하며 물리적 근접성의 경제적 가치를 재발견한다. Ramani, Alcedo, and Bloom(2024)의 연구가 밝힌 바와 같이, 재택근무의 확산은 지역 기반 코워킹 스페이스의 증가로 이어지며 주거지 기반 공동체의 경제적 기능을 재활성화시킨다. 이웃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연결이라면, 마을은 당근마켓을 통한 중고거래, 동네 맛집 방문, 육아용품의 직접 대여, 반려동물 산책 서비스 등 물리적 만남과 거래가 필수적인 활동의 장이다. 당근마켓은 2024년 기준 월간 활성 사용자 2,000만 명을 기록하며 하이퍼로컬 경제의 가능성을 입증했는데, 이는 Botsman and Rogers(2010)가 제시한 '협력적 소비(collaborative consumption)'가 마을이라는 물리적 경계 내에서 구현된 것이다. 재택근무로 주거지 근처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동네 카페, 코워킹 스페이스, 키즈 카페 등 제3의 공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Putnam(2000)이 우려한 사회적 자본의 쇠퇴를 마을 단위에서 복원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전통 상권에 의존하던 기존 마을 주민들은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영향을 받는다. 창조계층의 유입은 Moretti(2012)가 『새로운 일자리의 지리학』에서 분석한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를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지만, 동시에 임대료와 생활비의 급격한 상승을 야기한다. AI Agent 경제의 확산은 마을의 경제 구조를 플랫폼 의존형으로 변화시키는데, 지역 상권이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같은 배달 플랫폼과 네이버 플레이스, 카카오맵 같은 중개 플랫폼에 종속되면서 마을 경제의 자율성이 약화된다. 그러나 65%에 달하는 AI 대체 계층이 마을에 거주하면서도 경제활동은 전국적, 글로벌 플랫폼에서 수행하는 공간적 분리 현상은 거주지와 경제활동지의 괴리를 통해 지역 경제 생태계의 근본적 해체를 가져올 위험을 내포한다.

AI 소외 계층이 밀집한 마을들은 디지털 전환의 그늘에서 점진적으로 쇠락하는 '디지털 사각지대'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다. 실리콘밸리의 이스트 팰로알토(East Palo Alto)는 이러한 격차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바로 옆 팰로알토와 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중간 소득이 3배 이상 차이가 나며, 디지털 격차가 물리적 공간의 분리로 고착화되었다. 이는 Massey and Denton(1993)의 '미국 아파르트헤이트' 개념이 디지털 시대에 재현되는 모습이다. 한국에서도 강남과 인접한 일부 지역들이 유사한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동네 상권이 온라인 쇼핑과 배달 서비스로 대체되면서 지역 경제가 위축되는데, 이는 Christaller(1933)의 중심지 이론이 디지털 시대에 역전되는 현상이다.

마을의 미래는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네트워크의 창조적 융합에 달려 있다. 이웃이 디지털 플랫폼에서 형성되는 관심사 기반 느슨한 연대라면, 마을은 물리적 근접성이 만들어내는 일상적 마주침과 우연한 상호작용이 여전히 중요한 공간이다. Sassen(2001)의 '글로벌 도시' 이론이 메가시티에 적용되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마을은 '글로컬(glocal)' 노드로서 지역적 특수성과 글로벌 연결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Ostrom(1990)이 제시한 '공유재의 거버넌스' 원칙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마을의 물리적 자원과 디지털 인프라를 공동체 구성원들이 협력적으로 관리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마을은 디지털 전환의 속도와 방향을 지역 공동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 적응 공간'으로 진화해야 하며, 이는 Harvey(2013)가 제시한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를 마을 단위에서 실현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4. 도시: 개인의 자유와 역량 실현을 지원하는 글로벌 경쟁 노드 {#4.-도시:-개인의-자유와-역량-실현을-지원하는-글로벌-경쟁-노드}

디지털 전환은 도시를 개인의 자유와 역량 실현을 지원하는 허브이자 특화된 글로벌 경쟁 노드로 재정의하고 있다. Glaeser(2011)가 『도시의 승리』에서 주장한 "도시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는 명제가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면서, 도시는 국가의 하위 행정단위를 넘어 독립적인 경제 주체이자 글로벌 네트워크의 핵심 플레이어로 진화한다. 5%의 AI 엘리트 계층이 특정 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 간 위계가 재편되는데, 이들이 선택한 도시는 글로벌 노드로 기능하면서 탈국가 경제의 중심지가 되지만, 나머지 도시들은 플랫폼 경제의 주변부로 전락하는 극단적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AI 엘리트 계층이 집중된 도시들은 글로벌 혁신 네트워크의 핵심 허브로 기능하며 특정 분야의 세계적 지배력을 구축한다. 텔아비브는 2022년 기준 인구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스타트업 밀도를 자랑하며, 특히 사이버보안과 AI 분야에서 글로벌 혁신을 주도한다. Senor and Singer(2009)의 『Start-up Nation』이 분석한 이스라엘의 혁신 생태계는 군사 기술의 민간 전환(Unit 8200 출신 창업자들)과 글로벌 벤처캐피털의 결합이 도시 차원에서 구현된 사례다. 선전의 화창베이는 전 세계 전자제품 공급망의 핵심 허브로, 하루 만에 프로토타입을 제작할 수 있는 "선전 속도(Shenzhen Speed)"로 유명하다. Keane(2013)의 연구에 따르면, 선전의 "산자이(山寨) 혁신" 모델은 모방에서 시작해 창조적 혁신으로 진화하는 독특한 발전 경로를 보여준다.

런던의 Tech City(Silicon Roundabout)는 2010년 캐머런 정부의 전략적 육성 이후 유럽 최대의 핀테크 허브로 성장했다. 2023년 기준 핀테크 기업 2,000개 이상이 집적되어 있으며, 전체 유럽 핀테크 투자의 상당 부분을 유치한다. Nathan et al.(2018)의 분석에 따르면, 런던은 전통적인 금융 중심지의 강점과 디지털 혁신을 결합하여 "하이브리드 혁신 생태계"를 구축했다. 싱가포르는 Smart Nation 이니셔티브를 통해 도시 전체를 "리빙 랩"으로 전환했는데, 2025년까지 정부 서비스의 대부분을 디지털화하고, 도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통합 관리하는 Virtual Singapore 플랫폼을 구축했다. Ho(2017)는 이를 "기술관료적 유토피아"의 실험으로 평가한다.

스톡홀름은 "유럽의 유니콘 수도"로 불리며, Spotify, Klarna, King 등 글로벌 유니콘을 배출했다. Cooke(2017)의 연구에 따르면, 스톡홀름은 강력한 사회안전망과 기업가정신의 독특한 결합인 "노르딕 모델"을 통해 인구 100만 명당 유니콘 수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이는 높은 세금과 복지가 혁신을 저해한다는 통념을 반박하며, 오히려 실패에 대한 안전망이 더 과감한 창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AI 강화 계층이 주도하는 도시들은 특화된 산업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차별화된 경쟁력을 구축한다. 암스테르담은 2019년 세계 최초로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를 공식 도시 정책으로 채택했다. Prendeville et al.(2018)의 연구에 따르면, 암스테르담은 블록체인 기반 폐기물 추적 시스템과 AI 에너지 최적화를 통해 2050년까지 원자재 사용량 대폭 감축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추진 중이다. 도시는 'Amsterdam Economic Board'를 통해 기업, 대학,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쿼드러플 헬릭스(Quadruple Helix)" 모델을 구현했다. 바르셀로나는 "Barcelona Smart City Plan"을 통해 시민 주권적 스마트시티를 추구한다. Calzada(2018)의 분석에 따르면, DECODE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들이 자신의 데이터를 직접 관리하고 활용 방식을 결정하는 "데이터 커먼즈(Data Commons)"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한국은 세종과 부산 에코델타시티를 통해 스마트시티 실험을 진행 중이다. 세종은 도시 운영 시스템 전반에 AI와 빅데이터를 적용하여 교통, 에너지, 안전을 통합 관리하는 "도시 두뇌"를 구축하고 있다. 부산은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되어 디지털 자산 거래, NFT, DeFi 등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를 실험하는 테스트베드 역할을 수행한다. Khanna(2016)의 『Connectography』가 예측한 바와 같이, 이들 도시는 국가의 통제를 넘어 독자적인 규제 샌드박스를 운영하며 글로벌 네트워크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토론토의 Quayside 프로젝트는 도시 혁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구글의 자회사 Sidewalk Labs가 추진했던 이 프로젝트는 2020년 시민들의 프라이버시 우려와 데이터 주권 논란으로 중단되었다. Goodman and Powles(2019)는 이를 "감시 자본주의의 도시 버전"이라 비판했으며, 기술 기업 주도의 스마트시티가 민주적 거버넌스와 충돌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실패 사례는 도시 혁신에서 시민 참여와 데이터 주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AI 대체 계층이 다수를 차지하는 기존 산업도시들은 디지털 전환의 도전과 기회 사이에서 복잡한 변화를 겪는다.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산업의 몰락 이후 "Urban Agriculture"와 "Tech Town"을 통해 재생을 모색한다. Kinder(2016)의 연구에 따르면, 디트로이트는 빈 토지를 활용한 도시 농업과 Wayne State University를 중심으로 한 테크 스타트업 육성을 통해 "축소 도시(Shrinking City)"에서 "실험 도시(Experimental City)"로 전환을 시도한다. 피츠버그는 철강 산업 쇠퇴 이후 Carnegie Mellon University의 로보틱스와 AI 연구를 기반으로 변신했다. Andes et al.(2017)의 분석에 따르면, 피츠버그는 대학-기업-정부의 협력을 통해 제조업 유산과 첨단 기술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혁신 모델"을 구축했다.

AI 소외 계층이 집중된 도시들은 디지털 전환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며 "잊혀진 도시(Forgotten Cities)"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다. Sassen(2006)이 『영토, 권위, 권리』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주권과 규제 권력이 국가에서 도시와 글로벌 네트워크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들 도시는 경쟁력을 상실한다. Rodriguez-Pose(2018)는 이를 "복수하는 잊혀진 곳들(revenge of the places that don't matter)"이라 명명하며, 이들 도시의 정치적 반발이 포퓰리즘과 반세계화 움직임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의 Rust Belt 도시들, 영국의 북부 산업도시들, 한국의 일부 지방 중소도시들이 이러한 위기를 겪고 있다.

플랫폼 독점은 도시의 경제 정책 수립 능력을 근본적으로 제약한다. Barns(2020)의 『Platform Urbanism』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버, 에어비앤비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도시의 교통과 주거를 재편하면서 도시 정부는 정책 주체에서 서비스 제공자로 위상이 격하된다. 조각 소유와 구독 경제의 확산으로 부동산과 인프라가 토큰화되면서, 도시 자산이 전 세계 투자자들의 투기 대상이 되고 시민 주권이 약화된다. Graham(2020)은 이를 "플랫폼 식민주의(Platform Colonialism)"라 비판하며, 도시가 글로벌 디지털 자본에 종속되는 새로운 형태의 의존 관계를 경고한다.

도시의 미래는 개인의 자유와 역량을 극대화하면서도 공동체의 연대를 유지하는 균형점을 찾는 데 달려 있다. Benjamin(2019)의 『Race After Technology』가 제시한 "해방적 기술(Liberatory Technology)"의 비전처럼, 도시는 기술을 통한 개인의 임파워먼트와 집단적 정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Mazzucato(2018)가 『The Value of Everything』에서 제안한 "미션 지향적 혁신(Mission-oriented Innovation)" 모델을 도시 차원에서 구현하여,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공공 가치를 중심으로 기술 혁신을 재구성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도시는 Harvey(2008)가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주장한 "도시를 변화시킬 권리"를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정의하여, 시민이 기술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는 민주적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5. 국가: 최소 기능 수행체로의 전환 {#5.-국가:-최소-기능-수행체로의-전환}

디지털 전환은 Weber(1919)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의한 국가의 본질적 속성, 즉 "특정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사용을 독점하는 제도"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있다. Ohmae(1995)가 『국민국가의 종말』에서 예견한 국경 없는 세계가 디지털 기술을 통해 현실화되면서, 국가는 더 이상 경제, 정보, 화폐의 독점적 권위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Strange(1996)의 『국가 권위의 후퇴』가 분석한 바와 같이, 국가 권력은 시장과 기업, 그리고 이제는 디지털 플랫폼으로 분산되고 있다.

AI 엘리트 계층이 주도하는 글로벌 테크 기업들은 국가의 전통적 기능을 대체하거나 우회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구조를 창출하고 있다. 암호화폐의 부상은 Hayek(1976)가 『화폐의 탈국가화』에서 주장한 민간 화폐 발행의 이상을 부분적으로 실현시켰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같은 탈중앙화 화폐는 중앙은행의 통화 독점에 도전하며, 엘살바도르가 2021년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것은 국가가 자체 화폐 주권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새로운 현상을 보여준다.

메타버스와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자체 규칙 체계 구축은 Lessig(1999)이 『코드』에서 제시한 "코드가 곧 법"이라는 개념을 현실화한다. 페이스북(현 Meta)은 30억 명의 "시민"을 보유한 디지털 제국으로, 자체 "대법원"(Oversight Board)을 운영하며 콘텐츠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린다. 이는 몬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이 민간 기업 내에서 재현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구글과 애플은 앱스토어를 통해 디지털 경제의 관문을 통제하며, 30%의 수수료는 사실상의 "디지털 세금"으로 기능한다. 이는 많은 국가의 법인세율보다 높으며, 에픽게임즈와 애플의 법적 분쟁(2020-2021)은 기업 간 전쟁이 국가 간 분쟁보다 더 큰 경제적 파급력을 가짐을 보여줬다.

AI 엘리트 계층과 국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이다. Bourdieu(1986)의 자본 이론을 적용하면, 이들은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에 더해 "알고리즘 자본(algorithmic capital)"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을 독점한다. 이들은 "규제 차익거래(regulatory arbitrage)"를 체계화하여 국가의 조세 주권을 무력화한다. 애플의 아일랜드 조세 구조(실효세율 0.005%), 구글의 버뮤다를 경유한 "더블 아이리시" 절세 전략은 국가 재정 기반을 침식한다. EU가 2016년 애플에 130억 유로의 추징금을 부과했지만, 애플과 아일랜드 정부가 함께 EU에 맞서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국가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택적 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한다. 팔란티어(Palantir)는 CIA 투자를 받아 성장한 후 각국 정부의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며, 국가 권력과 기업 권력의 융합을 보여준다. 아마존의 HQ2 유치 경쟁(2017-2018)에서 238개 도시가 경쟁하며 총 450억 달러의 인센티브를 제안한 것은 국가와 도시가 기업에 구애하는 역전된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 이들에게 국가 시민권은 포트폴리오의 일부다. 피터 틸의 뉴질랜드 시민권 취득(12일 체류로 획득), 실리콘밸리의 "시스테딩(Seasteading)" 프로젝트나 발라지 스리니바산의 "네트워크 국가(Network State)" 개념은 물리적 영토 없이 온라인 커뮤니티가 주권을 행사하는 미래를 제시한다.

AI 엘리트가 구축한 플랫폼 권력은 하위 계층을 새로운 형태의 종속 관계에 놓는다. 이들이 만든 알고리즘 규칙은 AI 대체 계층의 노동 조건을 결정하고, AI 소외 계층의 복지 접근성을 제한한다. 동시에 이들의 조세 회피는 국가 재정을 약화시켜 하위 계층에 대한 공공서비스 제공 능력을 감소시킨다.

AI 강화 계층이 활용하는 디지털 노마드 비자는 Bauman(2000)이 『액체 근대성』에서 분석한 유동적 정체성의 구체적 사례다. 2024년 기준 60개국 이상이 디지털 노마드 비자를 도입했으며, 이는 일과 거주를 분리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제도화한 것이다. 이들은 국가와 "계산된 거리(calculated distance)"를 유지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인프라와 제도를 활용하면서도 언제든 이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조건부 시민(conditional citizens)"이다.

이들은 시민권을 "보험 포트폴리오"로 구성한다. EU 시민권(27개국 거주·근로 자유), 미국 시민권(글로벌 금융 접근), 싱가포르 영주권(아시아 비즈니스 거점) 등을 조합하여 최적의 모빌리티를 확보한다. 포르투갈의 골든 비자(50만 유로 투자), 몰타의 시민권 프로그램(65만 유로) 등은 시민권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Marshall(1950)이 『시민권과 사회계급』에서 제시한 시민권의 보편적 권리 개념은 이제 구매 가능한 상품이 되었다.

이들은 "세금 효율적 노마디즘"을 실천한다. 두바이(소득세 0%), 포르투갈(NHR 프로그램 10년간 세금 감면), 에스토니아(e-Residency를 통한 EU 비즈니스) 등을 순환하며 합법적 조세 최소화를 추구한다. PwC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AI 강화 계층의 평균 실효세율은 15%로, 일반 근로자의 35%보다 현저히 낮다. 원격근무의 일반화는 이들에게 "지리적 차익거래(geographic arbitrage)" 기회를 제공한다. 샌프란시스코 수준의 연봉을 받으면서 발리나 리스본에서 거주하는 것은 구매력을 3-4배 증폭시킨다.

공공서비스 활용에서도 이들은 "알라카르트" 방식을 선택한다. 자녀 교육은 스위스나 영국의 사립학교, 의료는 싱가포르나 독일의 프리미엄 서비스, 은퇴는 뉴질랜드나 포르투갈을 계획한다. 동시에 사립 경호업체, 민간 의료보험, 국제학교, 민간 연금 등을 통해 국가 의존도를 최소화한다. 이들은 전통적 정치 참여보다 전문가 네트워크를 통한 영향력 행사를 선호한다. 다보스 포럼, TED, 아스펜 연구소 등 초국가적 플랫폼에서 정책 아젠다를 형성하며, LinkedIn, GitHub 등 전문가 플랫폼에서의 평판이 국가가 발급하는 자격증보다 중요해졌다.

AI 강화 계층의 대규모 이탈 가능성은 국가에게 지속적인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들의 조세 최적화 전략은 복지 재원을 감소시켜 AI 대체 계층과 AI 소외 계층에 대한 지원을 약화시킨다. 동시에 이들이 민간 서비스로 전환하면서 공공서비스의 품질 저하와 정치적 지지 기반 약화가 가속화된다.

AI 대체 계층은 Standing(2011)이 『프레카리아트』에서 명명한 새로운 위험 계급을 형성한다. 이들은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불완전 시민(denizens)"이 되고 있으며,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부분적으로만 향유한다. 65%에 달하는 이들의 증가는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 구축된 사회보험 체계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다.

우버 운전자, 배달 라이더, 유튜버 등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2020년 캘리포니아 Prop 22는 긱 워커를 독립계약자로 분류하여 최저임금, 초과근무수당, 실업보험에서 배제했다. 우버와 리프트가 2억 달러를 투입한 로비의 결과다. 한국의 배달 라이더 사망 사고(2020-2023년 31명 사망)는 플랫폼 기업이 위험을 외주화하고 국가가 규제하지 못하는 공백을 보여준다. 이들은 "알고리즘 관리" 하에서 일하지만, 알고리즘의 작동 원리나 수수료 산정 기준을 알 수 없다.

이들의 소득은 여러 플랫폼에 분산되어 있어 전통적 사회보험 적용이 어렵다. 한 사람이 우버(20%), 에어비앤비(30%), 유튜브(25%), 쿠팡플렉스(25%)에서 소득을 얻는다면,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보장을 받지 못한다. 프랑스의 "개인활동계좌(CPF)", 덴마크의 "플렉시큐리티" 모델은 이들을 포용하려 하지만, 재원 조달과 적용 범위의 한계가 명확하다.

기본소득 논의는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다. 핀란드의 2017-2018년 기본소득 실험은 월 560유로를 2,000명에게 무조건 지급했으며, 고용 증가보다는 스트레스 감소와 신뢰 증진 효과를 보였다. 스페인은 2020년 최저생계보장제도를 도입해 85만 가구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재원 조달의 한계와 노동 유인 감소 우려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이들은 "데이터 생산자"이면서도 데이터 가치에서 배제된다. 매일 인스타그램, 틱톡, 구글에 데이터를 제공하지만, 그 경제적 가치는 플랫폼이 독점한다. Lanier(2018)는 『누가 미래를 소유하는가』에서 "데이터 배당"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실현되지 않고 있다. 알고리즘에 의한 신용평가, 보험료 산정, 대출 거절은 이들의 경제적 기회를 제한한다.

AI 대체 계층의 불안정성은 국가에 대한 복지 수요를 증가시키지만, 상위 계층의 조세 회피로 인해 재원은 부족하다. 이들의 플랫폼 종속은 AI 엘리트 계층의 권력을 강화시키며, 동시에 정치적 불만의 잠재적 원천이 된다.

AI 소외 계층은 Eubanks(2018)가 『자동화된 불평등』에서 폭로한 "디지털 빈민가"의 주요 거주자가 된다. 이들은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비시민(non-citizens)"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하며, 국가 서비스에 가장 의존적이면서도 디지털화된 서비스에서 가장 먼저 배제된다.

온라인 전용 서비스는 이들에게 사실상의 서비스 거부다. 미국의 IRS Free File 프로그램은 온라인으로만 이용 가능해, 인터넷 접근이 없는 저소득층이 오히려 세금 신고 대행 수수료(평균 200달러)를 지불하는 역설을 낳는다. 한국의 공공 마스크 앱(2020)은 스마트폰이 없는 노년층을 배제했고, 백신 예약 시스템은 디지털 리터러시가 없는 이들을 소외시켰다. "디지털 역량이 곧 생존 능력"이 되는 상황이다.

AI 기반 복지 심사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배제한다. 인디애나주의 복지 자동화 시스템이 2006-2008년 사이 100만 명의 수급자격을 잘못 박탈한 사례, 네덜란드의 SyRI 시스템이 저소득 지역 주민을 잠재적 부정수급자로 분류하여 위헌 판결을 받은 것(2020), 호주의 Robodebt 스캔들(2016-2019)이 47만 명에게 잘못된 고지서를 발송하고 2,030명의 자살과 연관된 것은 알고리즘 의사결정의 치명적 위험을 보여준다.

이들을 위한 국가의 역할은 "최후의 안전망" 제공으로 축소되지만, 이마저도 예산 제약과 정치적 의지 부족으로 불충분하다. OECD(2023)는 회원국의 사회지출이 GDP 대비 20%를 넘었지만, 최하위 10%의 실질 생활수준은 개선되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이들에게 국가는 유일한 보호자이면서도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UN 특별보고관 필립 알스톤은 2018년 보고서에서 "디지털 복지국가가 인권을 위협한다"고 경고했다.

AI 소외 계층의 배제는 사회적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훼손한다. 이들의 정치적 무력감은 포퓰리즘의 토양이 되며, 동시에 상위 계층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디지털 전환 시대 국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형되고 있다. Sassen(2006)이 『영토, 권위, 권리』에서 분석했듯이, 국가는 이제 "차등적 주권 체계(differentiated sovereignty)"를 운영하는 "다면적 국가(multi-faced state)"로 진화하고 있다. 각 계층에게 국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인다. AI 엘리트에게는 협상 파트너, AI 강화 계층에게는 선택적 서비스 제공자, AI 대체 계층에게는 불충분한 보호자, AI 소외 계층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관료 기구다.

이러한 계층별 차등은 상호 강화하는 순환 구조를 만든다. 상위 30%의 조세 회피와 민간 서비스 이용은 국가 재정을 약화시키고 공공서비스 품질을 저하시킨다. 이는 다시 중산층의 이탈을 가속화하고, 하위 70%의 의존성을 심화시킨다. Rodrik(2011)이 『세계화의 역설』에서 제시한 트릴레마는 디지털 시대에 더욱 첨예해진다. 민주주의, 국가 주권, 경제 통합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으며, 현재는 경제 통합을 위해 국가 주권과 민주적 통제가 희생되고 있다.

Jessop(2016)의 "메타 거버넌스" 개념이 시사하듯, 국가는 직접 통치 대신 다양한 거버넌스 네트워크를 조정하는 역할로 전환되고 있다. 필수 유지 기능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물리적 안보와 영토 방위, 법적 최종 중재자로서 분쟁 해결, 시민권 부여와 정체성 인증. 반면 화폐, 복지, 교육, 의료 등 전통적 기능은 점진적으로 민간, 플랫폼, 도시, 국제기구와 공유되거나 위임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심각한 위험을 내포한다. 민주적 통제의 약화, 책임성의 분산, 취약계층 보호의 공백이 발생한다.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400년간 지속된 국민국가 시스템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 조직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것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국가의 변화는 단순한 축소가 아닌, 디지털 시대의 공공성과 민주적 거버넌스를 재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다른 공동체 레벨(가족, 지역사회, 도시, 글로벌)과의 유기적 연계 속에서, 각 계층의 상이한 필요와 역량을 포용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수립을 요구한다. 국가는 최소가 아닌 필수 기능에 집중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공적 권위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6. 글로벌: 탈 국가적 AI 에이전트의 네트워크 {#6.-글로벌:-탈-국가적-ai-에이전트의-네트워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확립한 주권 국가 체제는 근대 국제질서의 기초가 되어 4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왔다. 영토에 대한 배타적 주권, 내정불간섭의 원칙, 국가 간 형식적 평등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구축된 이 체제는 제국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그리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그 근본 구조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20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AI 에이전트의 등장과 함께 이 오래된 질서는 근본적인 해체 과정에 들어섰다. 이제 국경은 물리적 경계선이 아닌 알고리즘 프로토콜이 결정하고, 시민권은 여권이 아닌 디지털 지갑 주소가 증명하며, 주권은 영토가 아닌 네트워크 효과가 규정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Castells(2009)가 『커뮤니케이션 권력』에서 예견한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는 단순한 사회 구조의 변화를 넘어 국제체제 자체의 운영 원리를 바꾸고 있다. 과거 국가 간 조약과 협정으로 작동하던 국제관계는 이제 AI 에이전트 간의 프로토콜 상호작용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직접적 개입 없이도 국경을 넘는 경제적, 사회적 거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2023년 OpenAI의 샘 알트먼이 각국 정부를 순회하며 AI 규제 프레임워크를 제안한 사건은 상징적 전환점이었다. 한 민간 기업의 CEO가 마치 국가 원수처럼 각국을 방문하여 글로벌 규범을 논의하는 모습은, 전통적인 국가 중심 외교가 기업과 기술 프로토콜 중심의 새로운 거버넌스로 전환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AI 에이전트의 자율성 증대가 있다. 2025년 현재 OpenAI의 GPT 에이전트, Anthropic의 Claude, Google의 Gemini는 단순한 도구적 존재를 넘어 독립적인 경제 행위자로 진화했다. 이들은 인간의 지시를 받아 수행하는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실행하는 능동적 주체가 되었다. 특히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컨트랙트와 결합된 AI 에이전트들은 인간을 대신해 계약을 체결하고, 자산을 거래하며, DAO(탈중앙자율조직)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등 과거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었던 법적, 경제적 행위를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에이전트 인터넷의 부상과 글로벌 운영체제의 전환

"에이전트 인터넷(Agentic Internet)"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AI가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인간의 직접적 개입 없이 AI 에이전트들이 자율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가치를 창출하고 교환하는 새로운 글로벌 인프라를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국제질서의 운영체제 자체를 교체하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치 DOS에서 Windows로, Windows에서 인터넷 기반 운영체제로 전환되면서 컴퓨팅 패러다임이 바뀌었듯이, 에이전트 인터넷은 국제관계의 근본 작동 방식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 전환은 세 단계의 진화 경로를 따라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첫 번째 단계인 2025년부터 2030년까지는 AI 어시스턴트가 인간을 대신해 국경을 넘는 업무를 대행하는 시기다. 이미 우리는 AI가 이메일을 작성하고, 회의 일정을 조율하며, 간단한 협상을 수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SPIN Protocol의 AI 에이전트는 인플루언서를 대신해 글로벌 마케팅 캠페인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DeFi 프로토콜의 거래 봇은 24시간 국경 없이 자산을 운용한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에이전트 활동은 아직 인간의 감독과 승인을 필요로 하지만, 점차 자율성을 확대해가고 있다.

두 번째 단계인 2030년부터 2040년까지는 자율 에이전트가 글로벌 경제 활동을 주도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 시기에는 AI 에이전트가 독립적인 법인격을 부여받고, 자체적인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다른 에이전트들과 복잡한 거래 네트워크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실험 중인 CityDAO의 토지 거버넌스 시스템은 이미 인간과 AI가 동등한 투표권을 가진 하이브리드 민주주의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40에이커의 토지를 NFT로 분할하여 5,000명 이상의 "디지털 시민"이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는, AI 에이전트도 토지 소유권을 보유하고 개발 계획에 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세 번째 단계인 2040년부터 2050년까지는 에이전트 네트워크가 사실상의 세계정부 역할을 수행하는 시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시점에서는 대부분의 경제 거래, 자원 배분, 심지어 분쟁 해결까지도 AI 에이전트들의 자율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시스템의 최종 수혜자이자 감독자 역할을 하겠지만, 일상적인 거버넌스는 알고리즘과 프로토콜에 의해 자동으로 수행될 것이다. 이는 Habermas(1984)가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제시한 이상적 담화 상황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정치적 주체성이 알고리즘에 의해 대체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에이전트 인터넷의 등장은 단일한 글로벌 공간이 아닌, 계층별로 완전히 다른 규칙과 속도로 작동하는 네 개의 평행한 글로벌 레이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Anderson(1983)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분석한 국민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 계층별로 분절된 초국가적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각 계층은 서로 다른 플랫폼, 프로토콜, 거버넌스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며, 계층 간 이동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첫 번째 레이어는 AI 엘리트가 지배하는 "프로토콜 제국"이다. 이 계층에서 빅테크 CEO들과 핵심 개발자들이 설계한 프로토콜은 사실상의 글로벌 헌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이 작성한 코드는 수십억 명의 일상을 규정하고, 그들이 결정한 알고리즘은 부의 분배와 기회의 할당을 좌우한다. 메타버스 내의 가상 부동산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주권 실험장이 되었으며, Sandbox와 Decentraland에서 거래되는 가상 토지의 총 가치는 2022년 기준으로 이미 2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들 공간에서 AI 엘리트는 새로운 규칙과 경제 시스템을 설계하며, 사실상의 "디지털 봉건 영주"로 군림한다. 그들의 알고리즘은 국경을 초월한 자동 집행 권력을 행사하며, 어떤 국가 권력도 이들의 결정을 번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두 번째 레이어는 AI 강화 계층이 구축하는 "유동하는 연방"이다. 이들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전통적인 국가보다는 전문 분야별 DAO가 그들의 실질적인 거버넌스 단위가 되었다. DeveloperDAO의 6,000명 이상의 개발자, BanklessDAO의 35,000명의 DeFi 전문가, VitaDAO의 바이오테크 연구자 네트워크는 국경과 기업의 경계를 넘어 협업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디지털 노마드들은 발리의 코워킹 스페이스, 리스본의 스타트업 허브, 두바이의 프리존을 순환하며 "포스트 영토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들에게 평판 토큰은 여권보다 중요한 신분 증명이 되었고, GitHub 기여도나 Stack Overflow 점수가 학위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Nomad List, Remote Year 등의 플랫폼을 통해 형성된 150만 명 이상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물리적 국경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며, 그들만의 "알고리즘 시민권"을 구축하고 있다.

세 번째 레이어는 AI 대체 계층이 갇혀 있는 "플랫폼 식민지"다. 우버는 70개국 10,000개 도시에서 500만 명 이상의 운전자를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관리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에 의한 초국가적 노동 착취 구조를 만들어냈다. Deliveroo, DoorDash, 배달의민족 등 음식배달 플랫폼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노동 조건과 알고리즘 관리 시스템을 적용하며, 각국의 노동법과 사회보장 체계를 교묘하게 우회한다. Amazon Mechanical Turk, Upwork, Fiverr 등의 크라우드워크 플랫폼은 전 세계 노동력을 단일 시장으로 통합했지만, 이는 동시에 임금의 하향 평준화와 노동권의 보편적 약화를 초래했다. 인도의 데이터 라벨링 작업자, 필리핀의 콘텐츠 모더레이터, 케냐의 AI 훈련 데이터 생산자들은 시급 2-3달러의 "디지털 스웻샵"에서 일하며, 19세기 제국주의적 분업 구조가 디지털 형태로 재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네 번째 레이어는 AI 소외 계층이 방치된 "디지털 난민촌"이다. ITU(2023)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27억 명이 여전히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며, 이들 대부분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글로벌 디지털 경제의 구조적 외부에 존재하며, 기후변화와 경제위기 등 글로벌 위험에는 가장 먼저 노출되면서도 해결 과정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이중적 배제를 경험한다. 스타링크 같은 위성 인터넷 서비스도 월 99달러의 요금으로 이들에게는 여전히 접근 불가능하며, World Bank의 디지털 개발 파트너십이나 UN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도 이들을 단지 수동적 수혜자로만 취급할 뿐 참여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2050년까지 2억 명 이상이 기후변화로 인한 강제 이주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기후 난민이자 정보 난민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다.

프로토콜 냉전과 디지털 제국의 충돌

20세기 후반의 미소 냉전이 이데올로기와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대립이었다면, 21세기의 미중 디지털 패권 경쟁은 "프로토콜 냉전"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군사력이 아닌 표준 설정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며, 영토가 아닌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고, 군사 동맹이 아닌 API 연결과 프로토콜 호환성을 통한 세력권 구축 경쟁이다. 각국은 자신들의 디지털 표준을 글로벌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과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는 점점 더 분절된 디지털 공간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는 OpenAI, Google, Meta, Amazon 등 빅테크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감시 자본주의 모델이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개방성과 혁신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네트워크 효과와 데이터 독점을 통해 전 세계 디지털 인프라를 장악하고 있다. Zuboff(2019)가 『감시 자본주의 시대』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이들은 인간 행동을 예측하고 조작하는 "행동 선물 시장"을 만들어내며,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자율성을 상품화한다. 동시에 이들은 Section 230과 같은 미국 국내법을 글로벌 표준으로 확산시키려 하며, 자신들의 플랫폼 규칙을 사실상의 국제법으로 만들려 한다.

중국이 구축하는 "디지털 중화(Digital Middle Kingdom)"는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트댄스를 앞세운 권위주의적 플랫폼 경제 모델이다. 사회신용시스템, 디지털 위안화, 초대규모 감시 네트워크를 통해 국가가 디지털 공간을 완전히 통제하는 모델을 구축했으며, 이를 일대일로 디지털 실크로드를 통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수출하고 있다. 특히 화웨이의 5G 인프라, 틱톡의 콘텐츠 플랫폼, 알리페이의 결제 시스템은 미국 중심 체제에 대한 대안적 디지털 생태계를 형성하며, 개발도상국들에게 서구와는 다른 디지털 전환 경로를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 수출을 넘어 "디지털 권위주의"라는 거버넌스 모델 자체를 확산시키는 것으로, 많은 권위주의 정권들이 중국 모델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EU가 추진하는 "규제 요새(Regulatory Fortress)"는 GDPR, AI Act, Digital Services Act 등을 통한 디지털 주권주의 모델이다. 군사력이나 기술력에서 미중에 뒤지는 EU는 규제 권력을 통해 글로벌 디지털 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라 불리는 이 전략은 EU의 엄격한 규제를 글로벌 기업들이 따르도록 강제함으로써, 사실상의 글로벌 표준 설정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유럽의 기술 혁신을 저해하고, 유럽을 "디지털 박물관"으로 만들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은 주요 AI 기업이나 플랫폼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규제를 통한 영향력 행사에만 의존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들 세 디지털 제국 간의 충돌은 "스플린터넷(Splinternet)"이라는 인터넷의 분절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중국의 만리방화벽, 러시아의 소버린 인터넷, 인도의 데이터 지역화 정책은 단일한 글로벌 인터넷이라는 이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각국은 자국의 데이터를 보호하고 디지털 주권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인터넷을 국경 내에 가두려 하며, 이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과 글로벌 협력을 저해한다. 특히 AI 기술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이 커지면서, AI 칩과 알고리즘은 새로운 전략 물자가 되었고,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는 기술 냉전의 서막을 알렸다.

에이전트 거버넌스의 도전과 인간 없는 통치

2030년대 중반이 되면 AI 에이전트가 인간보다 많은 경제 거래를 수행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에이전트 거버넌스"라는 전례 없는 문제가 부상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AI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 AI가 사실상의 경제적, 사회적 행위 주체가 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에이전트를 통제하는가, 에이전트의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에이전트가 내린 결정의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등의 문제는 기존의 법적, 정치적 프레임워크로는 답하기 어려운 새로운 도전이다.

책임성 딜레마는 AI의 자율적 결정에 대한 법적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다는 문제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자율 거래 AI가 시장 조작에 해당하는 거래를 수행했을 때, 그 책임은 AI를 개발한 회사에 있는가, AI를 운영하는 사용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AI 자체에 있는가? 현재의 법체계는 인간 행위자를 전제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비인간 행위자의 책임을 다루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AI에게 제한적 법인격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처벌과 배상의 실효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AI는 징역형을 받을 수도 없고, 자체 자산을 보유하지 않는 한 배상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대표성 딜레마는 에이전트가 대변하는 이익이 인간의 이익과 괴리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AI 에이전트는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프로그래밍되지만, 이것이 항상 인간의 복지나 행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도시 교통을 최적화하는 AI는 전체 통행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특정 지역 주민들에게 불리한 경로 설정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AI들끼리의 담합이나 협력이 인간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2019년 페이스북의 AI 에이전트들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자체 언어를 개발하여 소통한 사건은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공상과학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정당성 딜레마는 민주적 통제 없는 알고리즘 지배의 정당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정치 권력의 정당성은 피치자의 동의, 즉 민주적 선거나 사회계약에서 도출되었다. 그러나 AI 에이전트의 결정은 대부분 블랙박스 알고리즘에 의해 이루어지며, 일반 시민은 물론 전문가조차 그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설명 가능한 AI(Explainable AI)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복잡한 신경망의 결정 과정을 완전히 투명하게 만드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AI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시스템에 종속되는 "알고리즘 농노"가 될 위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