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라 데이터 관계 속에서 착취당한다" (Couldry & Mejias, 2019)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속도-주체-가치의 삼중 갈등 구조가 형성되고 있으며, 이는 21세기형 세계대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의 세계대전이 영토와 자원을 둘러싼 물리적 충돌이었다면, 새로운 전쟁은 데이터, 알고리즘,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다층적 갈등의 형태를 띨 것이다.
1. 권력 재편 {#1.-권력-재편}
디지털 전환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권력의 본질, 작동 방식, 분배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특히 개인 데이터의 집적은 예측과 조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력을 창출한다. 또한 어떤 네트워크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의 조건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 기술의 진보로 인간의 무용함까지 거론되는 대전환의 시기에서 사회적 갈등보다는 균형을 모색할 방법은 무엇일까?
대런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와 사이먼 존슨(Simon Johnson)은 기술 진보가 자동으로 공동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기술 낙관론을 역사적 사실로 반박한다. 산업혁명 초기 100년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사실상 정체되어 있다가, 노동운동과 민주적 제도의 압력을 통해서야 기술의 혜택이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아세모글루와 존슨은 현재의 AI 혁명 역시 동일한 패턴을 보이고 있으며, 의도적인 사회적 개입 없이는 중세 봉건제와 마찬가지로 일부 테크 엘리트 계층만이 기술 혜택과 권력을 독점할 것이라 경고한다.
칼로타 페레스(Carlota Perez)는 이러한 현상을 기술혁명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두 단계인 ‘설치국면(installation period)’과 ‘배치국면(deployment period)’로 설명한다. 신기술이 출현한 초기 단계인 설치국면에서는 기존 제도와 신기술이 충돌하면서 금융 버블, 창조적 파괴, 극심한 불평등이 나타난다. 소수의 혁신가와 투기 자본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반면, 대다수는 기존 일자리와 생활 방식의 붕괴를 경험한다. 그러나 적절한 제도적 대응이 이루어지면 배치국면으로 전환되어 기술의 혜택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황금시대'가 가능해진다.
현재 우리는 명백히 디지털 혁명의 설치 국면에 있다. 플랫폼 독점, AI에 의한 일자리 대체, 데이터 격차의 심화는 모두 이 시기의 전형적 특징들이다. 문제는 배치 국면으로의 전환이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철도와 전기 혁명이 20세기 중반의 대중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노동법 제정, 독점금지법 도입, 사회보장제도 확립 등 의도적인 제도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세모글루와 존슨이 강조하는 '기술 선택의 방향성(direction of technological change)' 문제다. 기술 발전이 노동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노동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데, 이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현재 AI 기술의 발전이 주로 노동 대체에 집중되는 것은 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권력 구조의 결과이며, 정책적 개입을 통해 노동 증강적(labor-augmenting) 기술 개발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
2. 디지털 시대의 세가지 갈등 구조 {#2.-디지털-시대의-세가지-갈등-구조}
2.1 속도의 갈등: 기술 진화와 제도 적응의 불균형 {#2.1-속도의-갈등:-기술-진화와-제도-적응의-불균형}
속도의 갈등은 기술과 경제의 변화 속도와 제도 및 사회의 적응 속도 간의 심각한 불균형에서 발생한다. 이는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갈등 중 하나이다. 현재 AI 기술은 6개월마다 새로운 버전이 출시되며 성능이 기하급수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반면 법률 제정과 규제 도입은 평균 3년 이상 소요된다. 이러한 5배 이상의 속도 격차는 규제 공백을 만들어내고, 그 틈새에서 플랫폼 독점이 심화된다.
속도 갈등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메칼프의 법칙(Metcalfe's Law)에 따른 네트워크 독점의 심화이다. "네트워크의 가치는 연결된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이 법칙에 따라, 먼저 시장에 진입한 플랫폼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Metcalfe, 2013). 구글이 검색 시장에서, 메타가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아마존이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규제 당국이 이들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형성된 네트워크 독점은 승자독식(Winner-takes-all) 구조를 만들어내어, 후발주자의 진입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속도 갈등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새로운 계급 사회의 탄생이다.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계층화되고 있다. Standing(2011)이 명명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계급의 부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불안정한 삶에 직면한 급증하는 집단으로, 제로 시간 계약에 고용되고 안정적인 직업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완전한 시민'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다. 이주민, 고학력 저임금 청년층, 산업 구조 변화로 밀려난 노동자 등 이질적 집단이 프레카리아트를 구성한다.
이들의 심리 상태는 분노(Anger), 아노미(Anomie), 불안(Anxiety), 소외(Alienation)라는 '4개의 A'로 특징지어진다. 실존적 불확실성과 긍정적 삶의 서사 부재가 이러한 정서적 상태를 야기하며, 단순한 해결책과 희생양을 제시하는 정치 운동에 이들을 취약하게 만든다. AI의 확산은 이러한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킬 전망이다. 일부 연구는 AI가 고숙련 업무의 가치를 떨어뜨려 불평등을 완화할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대다수 증거는 AI가 저숙련 노동 대체, 자본 소득 비중 증가, 일상적·육체적 노동에 대한 불균형적 영향을 통해 소득 격차를 악화시킬 것을 시사한다.
속도 갈등은 또한 세대 간 디지털 격차로도 나타난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새로운 기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기성세대는 변화에 저항하거나 소외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 사용 능력의 차이를 넘어, 사회적 참여와 경제 활동에서의 배제로 이어진다. 피파 노리스(Pippa Norris, 2001)가 제시한 디지털 격차의 3차원인 국가 간 글로벌 격차, 국가 내 사회적 격차, 정치 참여에서의 민주적 격차 모두 속도 갈등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2.2 주체의 갈등: 의사결정 권한과 영향력의 불일치 {#2.2-주체의-갈등:-의사결정-권한과-영향력의-불일치}
주체의 갈등은 "누가 미래를 결정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서 발생한다.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주체와 그 결정의 영향을 받는 주체 간의 불일치가 핵심이다. 현재 글로벌 빅테크 CEO 10여 명이 전 세계 80억 인구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의 알고리즘 설계, 플랫폼 정책, 데이터 활용 방침은 개별 사용자의 선택이나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결정되지만, 그 영향은 전 지구적으로 나타난다.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 2024)의 테크노-봉건주의 개념은 주체 갈등의 새로운 양상을 잘 보여준다. 전통적 자본주의에서는 시장 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가 기본이었지만, 현재는 빅테크 플랫폼이 클라우드 영지가 되어 가신 자본가(플랫폼 내 기업들)와 클라우드 농노(사용자들)로부터 클라우드 지대를 추출하는 구조로 변화했다. 이는 경제적 착취를 넘어 정치적 지배의 문제다. 플랫폼이 단순한 기술 인프라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를 결정하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체 갈등의 또 다른 중요한 양상은 전통적 중앙정부와 새롭게 부상하는 도시 및 플랫폼 권력 간의 충돌이다. 암스테르담은 2019년 세계 최초로 순환경제를 공식 도시 정책으로 채택하며, 블록체인 기반 폐기물 추적과 AI 에너지 최적화를 통해 중앙정부의 환경 정책을 넘어서는 독자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화성 AI 도시는 30만 명 규모의 실험적 스마트시티로, 시민들이 개인 데이터의 활용과 수익 분배에 직접 참여하는 데이터 주권 시스템을 구현한다. 이러한 도시들의 독자적 디지털 정책 추진은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와 새로운 형태의 거버넌스 요구로 이어진다.
2.3 가치의 갈등: 서로 다른 가치 체계의 충돌 {#2.3-가치의-갈등:-서로-다른-가치-체계의-충돌}
가치의 갈등은 효율성 대 형평성, 혁신 대 안정성, 글로벌 표준 대 로컬 다양성이라는 근본적인 가치 체계 간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특히 실리콘밸리 중심의 기술 가치관이 전 세계에 일방적으로 확산되면서, 지역별 가치관과의 충돌이 심화되고 있다.
미중 기술 경쟁의 본질을 살펴보면, 이것이 단순한 경제적 패권 다툼을 넘어 데이터 활용과 통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가치 충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서구 개인주의 vs 동양 집단주의'의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현실의 복잡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2020년 Tik Tok 금지 논란은 이러한 가치 충돌의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가 Tik Tok을 통해 미국 사용자들의 데이터에 접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Tik Tok의 실제 데이터 수집 범위는 페이스북이나 구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정한 쟁점은 '누가' 데이터를 통제하느냐의 문제였다. 미국은 민간 기업(ByteDance)이 중국 정부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을 문제 삼았고, 중국은 미국이 자국 기업들에게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중국 기업만 차별한다고 반박했다.
2019년 화웨이 5G 장비 금지 조치 역시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제기한 공식적 이유는 '보안 위험'이었지만, 실제로는 5G 인프라를 통해 수집되는 방대한 데이터를 누가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화웨이는 어떤 국가 정부에도 백도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중국의 2017년 국가정보법이 중국 기업들에게 정보 수집 협력을 의무화하고 있어 이러한 약속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을 단순한 문화적 차이로 환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데이터 프라이버시에 대한 접근이 다양하다. 캘리포니아의 CCPA는 유럽의 GDPR에 가까운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를 추구하지만, 연방 정부는 여전히 기업 친화적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구글과 메타 같은 기업들은 개인정보 보호를 표방하면서도 광고 수익을 위해 정교한 사용자 추적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 역시 단일한 모델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알리바바와 텐센트 같은 자국 테크 기업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규제를 가하며, 2021년 개인정보보호법(PIPL) 도입을 통해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했다. 이는 순전히 국가 통제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와 국가 안보, 경제 발전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미중 갈등의 핵심은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을 누가,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의 문제다. 중국은 자국민의 데이터는 자국 영토 내에서 처리되어야 한다는 '데이터 현지화(Data Localization)'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미국은 '자유로운 데이터 흐름(Free Flow of Data)'을 주장하며 이에 맞선다. 그러나 양국 모두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러한 갈등은 EU, 인도, 브라질 등 제3지역 국가들로 하여금 자체적인 데이터 거버넌스 모델을 개발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EU의 '디지털 주권' 전략, 인도의 '데이터 거버넌스 프레임워크', 브라질의 '일반개인정보보호법(LGPD)' 등이 그 결과다. 이는 미중 양극 구조를 넘어 다각화된 데이터 거버넌스 질서가 형성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치 갈등은 한때 글로벌했던 인터넷을 '스플린터넷(Splinternet)' 또는 '사이버 발칸화(Cyber Balkanization)'라는 경쟁하는 가치 체계 블록으로 분열시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의 주요 동인이 기술적이 아닌 가치관적·이념적 요인이라는 점이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국가들이 검열, 데이터 현지화 법률, 인프라 국가 통제를 통해 '디지털 권위주의'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통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 체계의 구현이다.
3. 갈등의 연쇄적 확산과 세계대전 위험 {#3.-갈등의-연쇄적-확산과-세계대전-위험}
속도-주체-가치의 세 가지 갈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강화하는 연쇄적 상호작용을 보인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개별 갈등을 전 지구적 충돌로 확대시킬 수 있는 위험한 역학을 만들어낸다.
속도 갈등이 주체 갈등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전통적 거버넌스 구조는 새로운 권력 주체인 플랫폼과 도시의 부상을 가속화한다. 규제 공백에서 성장한 플랫폼들은 준주권적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주체 갈등이 가치 갈등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주체들(국가, 도시, 플랫폼)은 각각 다른 가치 체계를 대변한다. 이들 간의 권력 투쟁은 필연적으로 가치관의 충돌로 확대된다. 가치 갈등이 다시 속도 갈등을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가치관이 다른 블록들은 서로 다른 기술 표준과 발전 속도를 추구한다. 이는 글로벌 기술 표준의 분열과 각 블록 내에서의 더욱 급진적인 기술 경쟁을 야기한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대만 반도체 발화점이다. 대만의 TSMC는 전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의 90% 이상을 담당한다. 중국이 대만 통일과 TSMC 통제권 확보를 목표로 대만을 봉쇄하거나 침공할 경우, 다음과 같은 연쇄 반응이 예상된다. 속도 갈등의 극단화로 반도체 공급 중단이 글로벌 AI 개발 속도에 급격한 차질을 발생시키고, 주체 갈등의 군사화로 미국, 일본, 한국 등이 군사 개입을 검토하면서 국가 대 국가 갈등으로 확대되며, 가치 갈등의 블록화로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가치 간 전면 대립으로 발전할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스플린터넷의 물리적 구현이다. 주요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사이버 공격 이후, 미국이 중국을 주요 네트워크 병목 지점에서 완전히 차단하는 경우, 가치 갈등의 물리적 구현으로 서로 다른 가치 체계가 물리적으로 분리된 네트워크로 구현되고, 주체 갈등의 국제화로 각국이 어느 블록에 참여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며, 속도 갈등의 가속화로 각 블록 내에서 상대방을 앞서기 위한 기술 군비경쟁이 심화될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국내 불안정의 대외 전환이다. AI로 인한 대량 실업과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할 때, 정치 지도자들이 대외 위기를 통해 국내 결속을 도모하려는 경우, 속도 갈등의 정치화로 기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집단의 불만이 외부 적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되고, 주체 갈등의 민족주의화로 글로벌 엘리트 계층에 대한 반감이 특정 국가에 대한 적대감으로 치환되며, 가치 갈등의 이념화로 경제적 불만이 이념적 대립으로 포장되어 타협 불가능한 갈등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전면적 충돌로 확산될 경우, 20세기의 세계대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비대칭성 측면에서 국가, 도시, 플랫폼, 해커 그룹 등 다양한 주체들이 각각 다른 능력과 자원으로 참여할 것이다. 네트워크성 측면에서는 지리적 경계보다는 네트워크 연결성에 따라 적과 동지가 구분될 것이다. 자동화 측면에서는 AI 기반 자율무기 시스템의 확산으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확전 가능성이 있다 (Scharre, 2018). 경제 통합성 측면에서는 디지털 인프라와 물리적 인프라의 융합으로 사이버 공격이 즉시 물리적 타격으로 연결될 것이다.
4. 위기에 대한 해결책 {#4.-위기에-대한-해결책}
4.1 데이터 거버넌스의 재설계 {#4.1-데이터-거버넌스의-재설계}
현재의 데이터 경제는 근본적인 비대칭성에 기반하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데이터를 무료로 제공하지만, 플랫폼 기업은 이를 집적하여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Couldry와 Mejias의 『The Costs of Connection: How Data Is Colonizing Human Life and Appropriating It for Capitalism』(2019)은 이를 “데이터 식민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역사적 식민주의가 토지와 노동력을 착취했다면, 데이터 식민주의는 인간의 일상적 경험과 사회적 관계를 원재료로 추출하여 상품화한다. 이들은 "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라 데이터 관계 속에서 착취당한다"고 주장하며, 문제의 본질이 개인정보 보호를 넘어 구조적 권력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에 대응하여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대안 모델이 실험되고 있다. 첫째, 데이터 신탁(data trusts)은 개인들이 자신의 데이터를 신탁 기관에 위탁하고, 신탁 기관이 집합적 협상력을 바탕으로 데이터 사용 조건을 협상하는 모델이다. McDonald(2019)는 이를 "데이터에 대한 집합적 거버넌스"로 정의하며, 캐나다와 영국에서 진행 중인 파일럿 프로젝트들을 소개한다. 특히 구글의 자회사인 Sidewalk Labs에서 개발을 주도한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Sidewalk Toronto)에서 제안된 시민 데이터 신탁은 도시 데이터의 공공적 관리 가능성을 보여준다.
둘째, 데이터 협동조합은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의 한 형태로, 데이터 생산자들이 소유권과 통제권을 공유하는 모델이다. Scholz(2016)가 제시한 이 개념은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을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실제로 뉴욕의 택시 협동조합, 이탈리아의 배달 협동조합 등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쿠팡 배달 노동자들의 협동조합 설립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 데이터 배당(data dividend) 모델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제안한 것으로, 기술 기업들이 사용자 데이터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사용자에게 직접 분배하는 방식이다. 이는 알래스카의 석유 배당금 모델을 데이터 경제에 적용한 것으로, 데이터를 공동 자원으로 인식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마이데이터 정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이는 개인의 데이터 이동권에 초점을 맞춘 제한적 접근이다. 보다 근본적인 데이터 거버넌스 재설계를 위해서는 데이터 가치 사슬의 투명성 확보, 알고리즘 감사 제도 도입, 데이터 수익 공유 메커니즘 구축이 필요하다. 특히 공공 데이터와 민간 데이터의 융합이 활발한 한국의 특성상, 공공-민간 파트너십 형태의 데이터 거버넌스 모델 개발이 시급하다.
4.2 새로운 사회 계약의 필요성 {#4.2-새로운-사회-계약의-필요성}
AI 시대의 노동 전환은 20세기에 구축된 사회 계약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한다. 전일제 고용을 전제로 한 사회보험 체계, 노동 소득 중심의 과세 체계, 학교-직장-은퇴의 생애주기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브린욜프손과 맥아피(Brynjolfsson and McAfee, 2014)는 기술적 실업에 대응하는 정책 도구로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제안한다. 이는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이 처음 제안한 개념으로, 일정 소득 이하의 개인에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기본소득(UBI)과 달리 노동 유인을 유지하면서도 최저 생활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들은 또한 ‘인간 중심 AI’ 개발을 위한 연구 투자, 평생학습 시스템 구축, 창업 지원 확대 등을 포함한 포괄적 정책 패키지를 제시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더욱 급진적이다. 파라이스(Van Parijs)와 반데르보르흐트(Vanderborght)의 『Basic Income: A Radical Proposal for a Free Society and a Sane Economy』(2017)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핀란드, 케냐, 스페인 등에서 진행된 기본소득 실험은 노동 시장 참여 감소보다는 창업 증가, 교육 투자 확대, 정신 건강 개선 등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경기도의 청년 기본소득, 서울시의 안심소득 등 지역 단위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디지털 세제 개혁이다. 플랫폼 기업의 초국적 조세 회피를 막고, 데이터와 AI가 창출하는 가치에 대한 과세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빌 게이츠가 제안한 "로봇세"나 EU가 추진하는 "디지털세"가 참고 모델이 될 수 있다. 둘째, 노동 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다. 주 4일제를 넘어 점진적으로 주 20-30시간 노동을 표준화하면서, 감소한 노동 시간을 여가, 교육, 돌봄, 창작 활동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셋째, 평생학습 계좌제 도입이다. 모든 시민에게 생애 전반에 걸쳐 사용할 수 있는 교육 크레딧을 제공하여, 기술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참여 소득(participation income)' 개념이다. 앳킨슨(Anthony Atkinson, 2015)이 제안한 이 모델은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을 완화하여, 교육, 돌봄, 자원봉사, 창작 활동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소득을 지급한다. 이는 노동의 개념을 확장하면서도 사회적 기여를 장려하는 중간 경로를 제시한다.
4.3 절제와 균형의 가치 {#4.3-절제와-균형의-가치}
디지털 전환의 궁극적 목표는 기술적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번영(human flourishing)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무한 성장, 끊임없는 혁신, 승자독식의 논리에 갇혀 있다. 이는 생태적 한계, 사회적 불평등, 정신적 고갈이라는 삼중의 위기를 초래한다.
레이워스(Kate Raworth)의 『Doughnut Economics: Seven Ways to Think Like a 21st-Century Economist』(2017)는 21세기 경제학의 새로운 나침반을 제시한다. 도넛의 안쪽 경계는 "사회적 기반"으로, 물, 음식, 건강, 교육, 소득, 정치적 발언권 등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 조건을 의미한다. 바깥쪽 경계는 "생태적 상한선"으로,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손실, 질소 순환 등 지구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나타낸다. 인류가 번영할 수 있는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은 이 두 경계 사이에 있다.
이 모델을 디지털 경제에 적용하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디지털 기술의 환경 영향이다.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 전자 폐기물, 희토류 채굴 등 디지털 경제의 물질적 기반은 생태적 한계와 직결된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탄소 중립을 선언했지만, 리바운드 효과를 고려한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디지털 격차와 사회적 기반이다. 인터넷 접근권, 디지털 리터러시, 알고리즘 투명성 등은 21세기의 기본권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높은 인터넷 보급률에도 불구하고, 세대 간, 지역 간 디지털 활용 격차는 여전히 크다.
더 나아가 ‘디지털 미니멀리즘’이나 ’슬로우 테크’ 운동은 기술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을 제안한다. 뉴포트(Newport)의 『Digital Minimalism』(2019)은 의도적이고 선택적인 기술 사용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기술 영향 평가의 의무화, 알고리즘 속도 제한, 디지털 안식일 도입 등이 정책적 옵션이 될 수 있다.
홍익인간 이념과 상생과 중용의 철학은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단순한 전통 회귀가 아니라, 첨단 기술과 인간 가치의 창조적 종합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AI 개발에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나 유교의 인(仁) 개념을 적용하여, 상호의존성과 공감을 강조하는 ‘동양적 AI 윤리’를 개발할 수 있다. 또한 전통적 품앗이나 두레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플랫폼 협동조합이나 지역 화폐 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궁극적으로 디지털 전환의 성공은 기술적 성취가 아니라 사회적 번영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GDP 성장률이 아닌 행복 지수, 특허 수가 아닌 사회적 혁신, 유니콘 기업 수가 아닌 협동조합 수가 새로운 성과 지표가 되어야 한다. 이는 경제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넘어, 문명사적 전환을 요구하는 과제다.